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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이승만
 작성자 : 파키  2015-12-18 21:42:33   조회: 1705   
청년 이승만






1875.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1877 (2세)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밖 염동, 낙동을 거처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자람.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 (4세)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

1885~1894 (10세~19세)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이근수(양녕대군 봉사손)의 도동서당에서 수학.




1895.4.2.(20세)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입학.

1896.5. (21세)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서양 학문을 배움.

1896.11.30.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음. 이승만은 서기, 회장을 맡음.








1896.11. 협성회



[ ......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 .....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 協成會 ....... ]


[......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 ......

......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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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晩이 平山에서 상경한 직후에 배재학당에서 徐載弼(서재필) 박사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가 열린 날짜나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발간준비를 위하여 분주하던 때였는데, 그가 귀국한 뒤에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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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晩도 이 환영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承晩이 서재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서재필과의 만남은 承晩이 개화기의 주역의 한 사람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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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정부의 보조를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시작했다. 金弘集 內閣은 독립신문사의 설립자금으로 4,400圓(「徐載弼 博士 自敍傳」에는 5,000圓)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하고, 이와는 별도로 서재필이 앞으로 10년 동안 中樞院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월봉 300圓의 거액을 받도록 조치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보장했던 것인데,63) 새로 구성된 貞洞派 內閣은 「독립신문」 발간에 한결 더 적극적이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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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영회가 있은 지 석달 뒤인 1896년 5월부터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요청에 따라 매주 목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나와 世界地理, 歷史, 政治學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특별 연속강의를 시작했다. 이 특별 연속강의는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承晩이 歐美 市民社會와 조선의 정치현실, 그리고 國際社會에서의 조선의 위치 등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연속강의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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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특강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때에 배재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과외활동으로 「리노니아」(Linonia)라는 文學討論會에 참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었는데, 그것을 본떠 배재학당의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69) 모임의 이름을 協成會라고 정하고 11월30일에 그 첫 회합을 열었다. 그것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協成會에 대한 서재필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좇아 일을 결처하는 학문들을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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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는 매주 거르지 않고 열렸다. 주제는 처음에 〈國文과 漢文을 섞어 씀이 가함〉(제1회), 〈學徒들은 洋服을 입음이 가함〉(제2회), 〈學員들은 매일 運動함이 가함〉(제4회) 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宗敎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제7회), 〈노비를 속량함이 가함〉(제8회), 〈國民이 이십 세 된 자는 일제히 兵丁으로 택함이 가함〉(제13회), 〈士農工商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이 가함〉(제17회), 〈우리나라에서 上下議院을 설립함이 급선무로 결정함〉(제24회), 〈財政과 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제42회), 〈각 고을마다 우체를 설치하고 인민의 서신을 종편 왕래케 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함〉(제47회), 〈나라를 開明하자면 新聞局을 각처에 설시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하는 문제〉(제50회) 등과 같이 사회구습의 타파, 정치제도의 개혁, 실업 교육의 실시, 체신제도의 확충, 언론 창달 등 근대 시민사회의 필수적인 주요 문제들을 망라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右議(찬성자)와 左議(반대자)를 두어 토론하게 하고 또 회의도 공개했기 때문에 토론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이 토론회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토론회는 1896년 11월30일부터 1898년 7월16일까지 모두 50회가 열렸는데,73) 회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변론술도 발전했다.


학생들이 박수치는 법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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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가 흥미있게 진행되자 協成會 회원수도 급증했다. 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하여, 일년 뒤인 1897년 12월에는 200명, 이듬해 3월에는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75) 일반인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은 협성회가 학생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개화운동을 위한 社會團體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협성회의 활동은 지방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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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孫世一 논설위원










1898.1.1. 주간신문 「협성회회보」 주필 이승만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1898.4.9.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사장 주필 이승만



[ ...... 「매일신문」....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 ]




1898.8.10. 「제국신문」 주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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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해서 배재학당에 나와 초등반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協成會 활동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는 토론회에서 가장 자주 연설자나 토론자로 선임되었고, 연설 예정자가 다른 일로 불참할 때에는 연설을 대신하기도 했다. 토론의 주제에 따라 결론이 찬성쪽으로 나든 반대쪽으로 나든 이승만이 참가하는 쪽이 연설을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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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발행으로 協成會 급성장


협성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토론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토론회의 내용과 결과를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一般國民과 政府官僚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제29회 토론회는 「우리 중에 일주일 간 會報를 발간함이 가함」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한 끝에 회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제33회 토론회는 「新聞局을 각처에 배설하여 인민의 이목을 넓힘이 가함」이라는 주제로 新聞의 중요성을 더욱 폭넓게 토론하고 있다.


신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開化派 知識人 사회에서 보편화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도 1897년 12월의 토론회에서 「인민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열리고 밝게 하려면 본 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신문지를 널리 발표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2)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신문들도 많이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98년 1월1일을 기하여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당시의 표기는 「협셩회회보」)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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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는 協成會의 기관지이기는 했으나 편집체제와 내용은 완전히 一般綜合紙였다. 실제로 발간 취지도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발간하기에 십여원씩 밑져 가며 이 회보를 발간하는 것은 전국 동포의 이목을 열어 내외국 형편이 어떻게 될 줄을 대강 알게 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 협력하여 우으로 임금과 나라를 받들고 아래로 우리 동포의 집안들을 보호하여 가자고 발론하여 시작한 것이러니 …〉6)


이러한 발간취지는 「독립신문」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한글전용을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체제도 「독립신문」과 똑같이 1면에는 「논설」, 2면과 3면에는 「내보」와 「외보」를 싣고, 4면에는 협성회 소식인 「회중잡보」를 실었다. 이 「회중잡보」도 협성회의 당시 사회적인 비중으로 보아서 일반에게 뉴스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7) 그런데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협성회회보」를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최초의 신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신문」의 발행인 徐載弼이 美國市民權을 가진 사람이고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발행한 일과 관련하여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守舊派 政權 아래 8년 동안 新聞 없는 時代 겪어


〈나는 몇몇 청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했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것이었다. 작은 신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지면을 통하여 自由와 平等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아펜젤러씨나 그밖의 사람들이 내가 急進的인 行動을 계속하다가는 목을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충고해 주었으나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公使館의 威脅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재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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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가 창간될 때에는 서울에서 네 가지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1895년 2월17일부터 발행하고 있던 「漢城新報」, 1896년 4월7일에 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 그리고 기독교신문으로 1897년 2월2일에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12월8일자 제45호부터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改題)와 두 달 뒤인 4월1일에 언더우드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이 그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발행되던 「漢城新報」는 대판 네 면 가운데에서 세 면은 한글, 한 면은 일본어로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 신문은 한국의 국체를 모독하는 글을 싣는가 하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비웃는 글(동요)을 실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漢城新報」는 明星皇后(閔妃) 弑害를 모의한 일본인들의 비밀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대적 신문의 효시는 1883년(고종20) 10월1일(양력 10월31일)에 정부기관인 博文局에서 발행한 「漢城旬報」였다. 朴泳孝, 兪吉濬 등 개화당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신문은 비록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國內外의 時事를 비롯하여 西洋의 新文化를 소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듬해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5년 12월21일(양력 1886년 1월25일)에 속간되면서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하던 것을 1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게 되어 제호도 「漢城周報」로 고쳤다.



그러나 「漢城周報」도 발간된 지 2년 반 만인 1888년 6월6일(양력 7월7일)에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그 뒤 수구파의 득세 속에서 8년 동안이나 신문 없는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창간된 일본인들의 「漢城新報」가 얼마나 왜곡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인기와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의 官僚와 知識人들 사이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시골 장터에서까지 널리 읽혔다. 郡守가 장터에 사람을 모아놓고 글 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꾼들에게 「독립신문」을 읽히어 들려주는 일도 있었다.9) 그리하여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뒷날 徐載弼은 술회했다.10)


「회보」 창간에 40전 기부해


「협성회회보」는 이러한 「독립신문」을 의식하면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이 정부로부터 4400圓의 보조금을 받아 발간된 것11)과는 대조적으로 「협성회회보」는 순전히 회원들의 출연금과 유지들의 찬조금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협성회회보」 창간호는 제호 바로 밑의 「논설」란 앞에 본문보다 훨씬 큰 2호 활자로 〈이 회보는 매 토요일에 한 번씩 발간하고, 파는 처소는 배재학당 제일방이오 값은 매장에 엽전 너 푼씩이니 사 보시기를 바라오〉라는 「광고」를 내고, 또 「회중잡보」란에는 〈1897년 12월30일까지 협성회에서 의연금 수입한 금액이 138원 11전이며 지출된 금액이 86원 7전으로서 현재 52원 3전 8리가 남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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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는 「협성회회보」의 발행과 보급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협성회회보」 1월 15일자(제3호)의 「회중잡보」에는 〈회원은 회보를 친히 찾아다 보고 그외 회보 보는 사람에게는 갖다 주기로 작정되었더라〉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독자들에게 배달까지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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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회회보」가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자 협성회는 마침내 야심적인 日刊紙 발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협성회는 3월19일의 토론회에서 「일주일 간에 한 번씩 내는 회보를 매일 한 번씩 발간하자고 작정」 했다.20) 그리하여 「협성회회보」는 4월2일자로 발행된 제14호를 마지막으로 하고, 제15호 발행 날짜인 4월9일부터 우리나라의 첫 일간지인 「매일신문」(당시의 표기는 「일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그때까지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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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 「논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간지를 발행하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자부하고 있다.


〈대범 서양제국서는 국중의 신문 다소를 가지고 그 나라 열리고 열리지 못함을 비교하거늘 돌아보건대 우리나라에 신문이 얼마나 되느뇨. 과연 부끄러운 바라. 만행으로 「독립신문」이 있어 영자로 발간하매 외교상과 나라 권리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영광이라. 그외 「한성신보」와 두세 가지 교중(敎中) 신문이 있으나 실상은 다 외국사람의 주장하는 바요,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하여 내는 것은 다만 「경성신문」과 우리 신문 두 가지뿐인데, 특별히 매일신문(일간신문)은 우리가 처음 시작하니 우리나라 사천년 사기(史記)에 처음 경사라, 어찌 신기하지 않으리오. 아무쪼록 우리 신문이 문명 진보에 큰 기초가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노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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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4월12일자(제3호) 「논설」은 두 면에 걸쳐 신문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논설」은 〈신문이라 하는 것이 나라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으로 세 가지 목적이 있으니 첫째 학문(學問)이요, 둘째 경계(經界)요, 셋째 합심이라…〉고 전제하고 그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첫째의 학문이란 신문의 啓導(계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경계는 批評과 告發의 기능, 셋째의 합심은 國民的 統合의 기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을 비롯한 협성회 간부들이 신문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말해준다.


〈새 韓國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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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작은 학생 신문이 정부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들에게 논설을 검열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이 강한 柳永錫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으나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徐載弼 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독립신문)을 팔 수 없다고까지 하게 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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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올리버가 「매일신문」의 발행과 관련하여 〈그(이승만)의 주제는 政府와 社會의 改革을 위한 정열적이고 반복적인 요구였다.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25)고 적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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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가 1주일 뒤인 5월27일자에야 회장인 이승만이 社長과 記載員(記者 내지 主筆)을 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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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프랑스의 利權要求 비판



이승만이 협성회 회장이 되고 나서 사흘 뒤인 5월16일자 「매일신문」은 1면 전면과 2면에 걸쳐 러시아와 프랑스가 韓國政府에 利權을 요구한 외교문서의 내용을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國家機密과 국민의 알 權利의 마찰이라는 언론의 본질적인 논제의 하나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요구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안의 땅을 섬들까지 빼지 않고 사겠다는 것이었고,34)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의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京義線 철도 부설공사에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35) 프랑스는 이미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놓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기사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선동적인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선 기재만 하거니와 이는 참 대한 신민의 피가 끓을 소문이라. 대소 인민 간에 대한의 신민된 이들이야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어찌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발분(發憤)하여 속히 조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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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와 은밀히 교섭하여 이권을 챙기려 했던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신문」이 이때의 상황을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만 명보다 어렵게 여기고…〉46)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와 러시아 및 프랑스는 마침내 당초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언론과 독립협회의 외교적 승리였다.




한국 최초의 언론법 新聞紙條例 제정



이때의 러시아 公使의 항의 조회에는 신문을 규제할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0월에 이르러서는 日本 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도 주한 외교사절 대표자격으로 外交文書를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게 하라는 조회를 外部에 보내왔다. 그리하여 신문관계법의 제정문제는 한국정부 안에서 논의가 계속되다가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난 직후인 1899년 초에 한국 최초의 언론법인 新聞紙條例47)가 제정되었다. 말하자면 李承晩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 외교문서를 폭로한 것이 新聞紙條例를 제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지조례는 시행되지 않은 채 폐기되고, 1907년에 가서야 흔히 「光武新聞紙法」으로 일컬어지는 新聞紙法이 제정되었다.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된 것은 다른 신문에도 큰 자극이 되어 「독립신문」도 7월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8월10일에는 「제국신문」이, 9월5일에는 「皇城新聞」이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어 마침내 한국에도 일간 신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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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은 「매일신문」이 속간된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제국신문」을 처음 준비한 사람들은 「매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던 以文社그룹이었는데, 이들 新興商工業者들은 4000~5000원의 자본56)으로 경영을 맡고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李鍾一, 李承晩, 柳永錫 세 사람이 편집을 맡는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以文社 명의로 신문발간 인가를 받은 다음 사장은 李鍾一이 맡았고, 李承晩은 主筆로서 주로 「논설」을 집필했다.57)


「제국신문」은 창간사격인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발간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본사에서 몇몇 유지한 친구를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가지고 새로 신문을 발간할 새 이름을 제국신문이라 하여 순국문으로 날마다 출판할 터이니, 사방 첨군자(僉君子)는 많이 주의들 하여 보시오.

대개 제국신문이라 하는 뜻은 곧 이 신문이 우리 대황제 폐하의 당당한 대한국 백성에게 속한 신문이라 함이니 뜻이 또한 중대하도다. 본래 우리나라 대한이 개국한 지 사천여년 동안에 혹 남에게 조공도 하고 자주도 하였으나, 실로 대한국이 되고 대황제 존호를 받으시기는 하늘 같으신 우리 황상(皇上) 폐하께오서 처음으로 창업하신 기초라. 우리 일천이백만 동포가 이같이 경사로운 기회를 즈음하여 나서 당당한 대한제국 백성이 되었으니 동양반도국 사천여년 사기에 처음되는 경사라.…〉



대한제국의 선포를 경축하는 뜻으로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면제작 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동안 국중에 신문이 여럿이 생겨 혹 날마다 발간도 하며, 혹 간일(間日)하여 내기도 하며, 혹 일주일 동안에 한두 번씩 내기도 하는데, 그중에 영어신문이 하나이오 국한문으로 섞어서 내는 것이 하나이오 일어로 섞어 내는 것도 있으되 그 중에 국문으로 내는 것이 제일 긴요할 줄로 믿는 고로 우리도 또한 순국문으로 박일 터인데, 논설과 관보와 잡보와 외국 통신과 전보와 광고 등 여러 가지를 내어 학문상에 유조할 만한 말이며 시국에 진적(眞的)한 소문을 들어 등재하려는 바, 본사 주의인즉 신문을 아무쪼록 널리 전파하여 국가 개명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특별히 값을 간략히 마련하고 날마다 신실히 전하여 보시는 이들에게 극히 편리하도록 주의하오니…〉58)


庶民層과 婦女子들 읽게 신문값 싸게 매겨


이처럼 「제국신문」의 주된 발행목적도 「독립신문」이나 「매일신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국민 계몽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한글전용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신문값을 다른 신문에 비하여 싸게 매긴 것은 庶民層과 婦女子들에게까지 읽히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뒷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뒤에 「제국신문」이 다음과 같이 특별히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글전용이 오직 널리 읽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제 나라 글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남의 나라 글을 배우되 제 나라에 글이 없는 고로 인민생활상에 제일 필요되는 내 나라 역대 사적이 없어서 중원(中原:곧 中國) 역사부터 가르치고 배운즉 … 그런 고로 자기 나라는 소홀히 알고 남의 나라 위하는 사상이 팽창하여 사람마다 독립사상이 없고 의뢰심만 남아서 남에게 의뢰하기를 좋아하다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로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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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국신문」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제호의 연원이 된 大韓帝國과 운명을 같이하여 1910년 8월2일에 폐간되었다. 李承晩은 뒤에서 보듯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2년 3개월 동안이나 비밀히 「제국신문」의 논설을 써서 내보냈는데, 출옥하고 나서도 석달 뒤에 美國으로 떠날 때까지 「제국신문」 제작에 관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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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李承晩의 政治經歷은 言論活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활동의 내용은 自由와 民權을 위한 투쟁이었다. 李承晩의 의욕적인 언론활동은 그 자신을 民權運動의 젊은 지도자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日刊紙時代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1898년 한 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언론활동의 경험은 뒤이은 옥중생활과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한 선전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열성을 기울이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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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8)

李承晩, 日刊紙시대를 열다


孫 世 一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 ....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 .......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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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 ....... ]


[ ....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 ]





(1) 첫 萬民共同會의 연사와 총대위원




1898년 3월10일 오후 2시에 종로 네거리에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大衆集會가 열렸다. 이날짜 「독립신문」은 〈오늘 오후 두 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유지각한 이들이 좋은 연설을 한다고 뜻있는 군자들을 청하였다더라〉는 예고기사를 싣고 있다. 이 집회는 徐載弼, 李完用, 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1)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미국 대중집회의 격식과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의 집회에 독립협회 간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젊은 교사와 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우기로 했다.



李承晩은 玄公廉(현공렴), 洪正厚(홍정후) 등과 함께 이 역사적인 대중집회의 연사로 선정되었다. 李承晩과 홍정후는 배재학당 대표였고, 현공렴은 경성학당 대표였다. 현공렴은 開化派 史學者 玄采(현채)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한 뒤에 경성학당에 다니면서 光武協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고 있었다. 협성회 간부 李承晩이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집회에는 주최 쪽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독립신문」과 鄭喬(정교)는 이날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고,2) 집회를 참관한 외국 사람들도 8000명에 가까운 인파로 추산했다.3)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



집회는 먼저 米廛(미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그것은 일반대중의 참여를 과시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연사들은 白木廛(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을 했다.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편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4) 청중들은 박수로서 『옳소(可)』라고 하면서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표시했다.5) 이어 대회는 외부대신에게 보내는 회중의 일치된 뜻을 밝힌 편지를 채택하고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외부에 전달하도록 했다.



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독립협회가 이 집회를 계획할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民會」라고만 했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여 이날 이후로는 대중집회를 가리켜 「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날의 집회는 질서정연했고 연사들의 연설 기조도 침착했다.6)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관했는데, 개중에는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도 공사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있었고,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미국인들도 와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집회는 정부와 서울의 외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대회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7)



외부대신 閔種默(민종묵)은 이튿날 세 총대위원 앞으로 〈공동한 의론을 알았으며 러시아 고문관과 사관을 보낼 일은 탁지부와 군부의 소관이요 또한 정부에서 어떻게 의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답장을 보냈다.8)


李承晩은 이 답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12일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 붙였다.


그런데 이날 이틀 전에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자리에 독립협회와는 관계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촌 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고, 또 북도 사람 네 명과 시위대 사관 두 명이 반대연설을 하려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9)




러시아人 財政顧問과 軍事敎官 철수



1898년은 독립협회의 自主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다. 독립협회는 朝鮮이 淸國으로부터 獨立한 것을 기념하여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그 주변에 獨立公園을 조성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896년 7월2일에 결성된 사업단체였으나, 실제로는 徐載弼 등 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政治結社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계몽적인 講演會에 이어 1897년 8월29일부터는 배재학당의 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의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898년에 접어들어서는 上疏(상소)와 정부 각부에 보내는 편지와 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와 의회설립 요구 등의 運動을 강력히 전개했다.



3월10일의 만민공동회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협회의 회원수도 급속히 늘어났고, 公州, 平壤, 大邱, 宣川, 義州, 木浦, 仁川 등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0)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3월12일에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고, 17일에는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해 왔다.11) 뿐만 아니라 절영도 석탄기지 租借(조차) 요구도 철회하고, 3월1일에 설립한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12)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徐載弼의 재출국 막기 위한 萬民共同會 주도



3월10일의 만민공동회 이후로 독립협회의 소장파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李承晩은 「매일신문」을 펴내는 데 열중하면서도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4월30일에 崇禮門(숭례문: 남대문) 안에서 열린 서재필의 在留(재유)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열린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대회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 동안 독립협회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면서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며 고급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자, 친러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서재필을 해고하여 추방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재정고문과 교련사관이 해고되어 출국하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고문 해고를 빙자하여 4월에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4월25일에 그러한 조치는 부당한 일이라고 극력 반대하면서 서재필의 再雇騁(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사흘 뒤인 4월28일에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在留 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사실상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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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안 만민공동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날의 만민공동회는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냄과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재유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李承晩과 함께 崔廷植(최정식)과 鄭恒謨(정항모)를 총대위원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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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4100063&ctcd=&cpage=1

2002년 4월호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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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는 시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현공렴·이승만·홍정후·조한우·문경오 등이 연설하였다. 이 시기 연설은 의사전달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때 기록에 의하면, “백목전(백목천을 팔던 가게) 다락 위에서 연설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 이것은 당시의 연설형태를 보여준다. 즉, 당시 종로에 있던 시전 가게의 건축 표준양식은 2층이었다. 1층은 가게이고 2층은 1층보다 높이가 낮은데 창고로 사용하면서 ‘다락’이라고 불렀다.


이 다락에서는 독립협회 간부들의 토론회도 열렸으며, 3월 10일에는 연사들이 백목전 2층 다락으로 올라가 집 밖을 내다보며 연설을 했던 것이다.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이것이 청중들과 교류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 역사 최초의 의미 깊은 대중연설이었을 것이다.




<참고>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관련 기사



경계자는 아라사 공사가 외부에 조회 한 사건에 대하여 일만 백성이 공동회의를 하와 대한에서 아라사에 고빙한 탁지부 고문관과 군부에 교련사관을 일병 해고하여 대한의 자주권을 튼튼케 할 일로 가(可)하다는 의론을 결정하여 이에 앙포하니 조량하옵셔서 만민의 동심앙망하는 것을 맞추게 하심을 바란다고 하였는데, 총대위원은 이승만, 장붕, 현공렴 삼씨더라.

이 회에 잠시 모인 사람은 만 여 명인데,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고, 정부에서 이 조회 답장을 민심을 따라 하기들을 바라는 모양이더라. 연설한 이는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 조한우, 문경오 제씨이더라.


(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자 잡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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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32&content_id=cp040700320001&search_left_menu=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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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0.12.




[ .....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 ....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 ....... ]

[ .....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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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과 皇太子에 아편 탄 커피 올려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문제와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金鴻陸(김홍륙) 毒茶事件(독다사건)은 다시 한번 정국을 뒤흔들었다. 김홍륙은 러시아 공사관 통역으로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에 고종의 측근에서 러시아 세력을 업고 온갖 전횡을 자행했고 환궁한 뒤에도 갖은 농간을 부렸던 사람이데, 독립협회의 국정감시로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고, 高宗도 8월25일자로 그를 해임하여 海島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그의 심복 孔洪植(공홍식)에게 아편 한 냥쭝을 주어 高宗이 마시는 차에 타게 했고, 공홍식은 하수인을 시켜 9월11일에 고종과 황태자에게 아편을 탄 커피를 올렸다. 고종은 구토를 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는 큰 위난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심문하면서 경무사 閔泳綺(민영기)는 죄인을 잔악하게 고문하고, 9월24일에 열린 中樞院은 의관 34명의 이름으로 신법을 개정하여 이미 폐지된 拏戮法(나륙법: 대역죄와 같은 큰 죄를 지으면 그 자손들도 연좌하여 사형에 처하던 형법)과 連坐法(연좌법)을 부활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가 하면,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申箕善(신기선) 등은 이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는 9월25일의 통상회의에서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죄인을 악형으로 고문한 사실과 중추원의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는 국민의 生命과 財産의 自由를 침해하는 것이며 신법을 개악하는 것이라고 결의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그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독립협회는 10월1일에 중추원 문앞에서, 이튿날에는 高等裁判所 문앞에서, 6일에는 다시 고등재판소 문앞에서, 그리고 7일에는 高宗이 거처하는 慶運宮의 仁化門 앞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악법의 부활기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高宗과 수구파 각료들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仁化門 앞에서 대회를 해산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의 부활 기도에 찬성하는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로 투쟁을 확대하기로 했다.


독립협회는 8일에 인화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7대신의 탐학을 낱낱이 들어 규탄하고 그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두번째 상소를 올렸다. 이 철야투쟁은 이내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서울 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서 보내 온 의연금이 600여 원에 이르렀다.24) 독립협회는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남겨 인화문을 떠나지 않게 하고 낮에는 다시 모여 민중대회를 열면서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高宗의 批答(비답)을 기다렸다.


高宗이 7대신에게 경고는 하되 교체는 않겠다고 하자 독립협회는 인화문 앞에서 집회를 더욱 확대하면서, 10일에 다시 7대신 파면과 전면개각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렸다.25) 인화문 앞 농성에는 각 학교 학원들과 철시를 한 시전 상인들도 참석하여 날이 갈수록 규모가 더욱 커졌다.

경무청에서는 강제로 시전을 열게 하려 했으나 상인들은 지금은 전과 달라 관인의 무례한 압제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부했다.26)



改革派 內閣 탄생시킨 「平和的革命」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강경한 개각요구와 집회의 대규모화 추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안 高宗은 마침내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임명했다. 그것은 10월1일부터 열이틀 동안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시위를 벌인 끝에 쟁취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힘으로 改革派內閣을 성립시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12일 저녁에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27) 각국의 외교관들도 이러한 사태에 경탄했다. 미국 공사 알렌이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이루어졌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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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9)











[ ...... 中樞院新官制가 공포 ....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 ...... ]

[ .....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 ..... ]


189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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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民共同會에서 「獻議六條」 채택



이튿날 독립협회는 정부에 다시 대관들의 참석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쪽에서도 독립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오 2시에 이윽고 역사상 처음으로 官民共同會가 열렸다.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은 윤치호가 입궐하여 高宗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을 비롯한 관인들과 황국협회, 順成會(북촌에 거주하는 부인들 모임), 황국중앙총상회 등 각종 사회단체, 각 학교 학도들, 시전 상인들, 승려, 맹인, 宰設軍(재설군: 백정)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대회는 오후 3시경에 개회했다. 먼저 대회장 윤치호가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정부대표 박정양이 등단했다.


『어젯밤 이곳에 와서 勅語(칙어)를 전하고 돌아가 상주하자 인민이 노천에서 날을 보내니 오늘이라도 정부 대신들이 일찍 나아가서 참석하여 그 利國便民(이국편민)의 방책을 들으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협의 후 모두 해산하면 곧 입궐하여 협의내용을 상주하겠소』

만세와 박수소리가 잇따랐다.


회중에서 누구든지 나와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머뭇거리고 있는데 朴成春(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나와서 연설을 했다. 대신들 앞에서 백정이 연설을 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둘러처져 있는 차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대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國祚(국조)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40)



백정은 갑오경장 때에 천민신분에서 해방되었었다. 회중은 이 백정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몇 사람이 의견을 개진한 다음 11개조의 의안이 상정되었고, 먼저 6개조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것이 유명한 「獻議六條(헌의육조)」인데, 그 내용은 1) 專制皇權(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체결 등은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 3) 전국의 財政과 租稅는 度支部에서 관장하고 豫算 決算은 人民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公判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시행, 5) 勅任官(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서 임명, 6) 章程(장정)의 실천이었다.


6항의 장정 실천의 촉구는 갑오경장 이후로 새로 제정한 法律과 각 부의 章程을 정부가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석한 대신들도 모두 이 「헌의6조」에 「可」자를 적어 서명했다.


이어서 중추원 의장 한규설과 박정양이 대회를 치하하는 연설을 했다. 대신들은 「헌의6조」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내일 하오 1시까지 회중에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회중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르며 해산했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41)



官民共同會 해산 막아 中樞院 신관제 공포케


이튿날 독립협회는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 중추원 민선의관 25명을 독립협회에서 내게 된 경과보고를 들은 다음 중추원 관제의 개정이 공포되는 대로 25명 의관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논의했다. 「헌의6조」의 공포 여부를 알려 줄 시한인 하오 1시가 지나자 독립협회는 총대위원을 정부에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에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속개하고 「헌의6조」의 재가를 기다렸다.


정부는 「헌의6조」는 모두 마땅히 실시할 것이고 그밖에 몇 조항을 첨가하여 조칙으로 공포하고 관보에 올릴 터이니 추운 날씨에 밖에 있지 말고 해산하여 기다리라는 뜻을 전해왔다.


회중은 돌아가 기다리기로 하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 高宗은 31일 새벽에 30일자로 「헌의6조」의 공포와 함께 「詔勅五條」를 내렸는데, 조칙은 첫조항에 〈(갑오경장으로) 諫官(간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폐지한 뒤로 言路가 막히어 상하가 勸勉警勵(권면경려)의 뜻이 없기로 중추원 장정을 정하여 실시할 것〉을 규정했다. 그것은 중추원 개편을 실질적인 의회개설로 생각하는 독립협회의 견해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는 내용이었다.



농상공부 대신 金明圭(김명규)가 나와 「헌의6조」가 재가되고 그것에 더하여 「조칙5조」까지 내린 것을 알리자 회중은 이를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에 李承晩은 군중 앞에 나아가 군중을 제지하면서 외쳤다.


『무릇 국사에 매번 조칙이 있어서 정부가 조치하도록 하여도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이다. 이는 우리가 강력히 諫(간)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본회는 경솔히 해산할 것이 아니라 대신들이 만일에 이를 실시하지 않으면 爭論(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것이외다』42)


회중은 李承晩의 주장에 찬동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관민공동회를 더 계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이제 대중집회의 선동가로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관민공동회는 이튿날도 속개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위한 정부의 조치를 기다렸다. 그 다음날인 11월2일에 공동회는 총대위원 3명을 선정하여 정부에 「헌의6조」를 조속히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에서도 고무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관민공동회는 엿새 동안의 집회를 마치고 오후 4시에 해산했다.



드디어 11월4일에 11월2일자로 된 中樞院新官制가 공포되었다. 이날 공포된 신관제에 따르면 中樞院은 〈法律과 勅令의 제정과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들을 審査議定하는〉 機關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國民代表가 참가하는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날 정부는 독립협회에서 25명의 의관을 선거하여 그 명단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고, 독립협회도 이튿날(11월 5일) 독립관에서 중추원 의관 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43)




『國體를 共和政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의회 설립의 기회는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의 악랄한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추원 신관제가 공포된 바로 그날(11월4일) 밤에 궁중에 머물던 의정부 찬정 조병식은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이자 황국협회 회장인 이기동 등과 밀모하고, 잡배들을 시켜 광화문 밖과 성내 몇몇 요소에 독립협회 쪽에서 작성한 듯이 꾸민 익명서를 몰래 내다 붙이게 했다.44) 尹致昊의 회고에 따르면, 익명서의 내용은 朝鮮王朝는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大統領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開明進步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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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 ....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 .......

....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 ]


[ ....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 ]




189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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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제5일째인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서리 유기환은 아직
도 군대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제3대
대의 2개중대 병력을 대회장에 투입해서 충돌을 유도하며 탄압을 획책했다
가 실패하였다.50)


이날도 아침부터 날이 어둡고 찬비가 소소히 내리어 회민의
옷을 적시었다. 회중들은 찬비를 맞으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더욱 의기가
분발하였다.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이를 보고 의연금을 계속 보내어 왔다.


예컨대 茶洞에 사는 朴召史는 집 판돈 100원을 내놓아 만민을 감격케 했으
며,51) 한 나무장수는 장작 수십 바리를 실어와서 밤을 지새는 땔감으로 쓰도
록 했고, 한 과일장수는 단배 3석을 보내어 회원의 목마름을 축이게 했으며,
술장수는 새로 빚은 술 수십 통을 보내어 추위를 이기는 데 돕도록 했고, 심
지어 걸인 한 사람도 1원을 보조했으며 청국상인까지도 감동하여 4원을 보
조하였다.52) 또한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이날도 철시를 단행하여 만민공동회
를 적극 성원하였다.53)



이날 찬비속에서의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구경나온 외
국인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54) 외국공사․영사들도 감동하여 외부를 방
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표시하였다.55)


뿐만 아니라 만민공동회에 대처하여 파수를 보던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
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56)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
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돌아가 버렸다.57) 심지어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친러수구파
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58)
이날 밤은 찬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민들은 추위와 찬비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하였다.59)



만민공동회 제6일째인 11월 10일에는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
리하게 전개되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5시경 한성판윤을 시켜 회중의 민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중은 ①불량배들과 더불어 재판받
아 충신과 역적을 밝히고, ②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즉각 실시하며, ③혁파
한 독립협회의 복설을 요구한다고 응답하였다.60)


황제 고종은 마침내 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날 조병식․민종묵 등에게
해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들을 해임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李金憲
永을 의정부 참정으로, 농상공부대신 박제순을 외부대신으로, 학부대신 李道
宰를 임시서리 내부대신 사무로 임명했으며, 유기환을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
무에서 해임하고 군부협판 趙東潤을 그 자리에 임명했고, 경무사 신태휴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閔丙漢을 임명하였다.61) 이로써 만민공동회가 규탄하는
익명서 조작의 장본인들이 대신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구파들이
기용된 것이지, 개혁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황제는 이날 오후 7시에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
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한규설을 재판장으로 한 고등재판소
재판부는 ①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칙령을 위반하여 ‘離次開會’ 했으며, ②
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笞40에 처한다
고 선고했으며, 17명 중에서 칙임관․주임관으로서 實職이 있는 사람만 贖錢
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결정하여 17명 전원을 즉각 석
방하였다.62) 이것은 극히 가벼운 벌금형으로서, 거의 무죄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만민들은 황제와 수구파의 시위대 및 경무청의 무력 위협과 찬 겨울비속
에서도 철야하면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만 6일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17명
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되찾고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서울 장안이
울리도록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63) 석방된 17명 독립협회 지도자를 대표하여
이상재가 조한우를 대리로 시켜 만민의 투쟁에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를 하
였다.64)


만민공동회는 성립과 동시에 찬 비바람속에서 만 6일간의 철야시위의 간
구한 투쟁으로 황제와 수구파에 의해 체포 감금된 독립협회의 17명 지도자
들을 석방시킨 대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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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국사편찬위,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신용하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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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인간의 탄생



19세기 말, 특히 1898년은 한국 역사상 근대적 인간이 탄생한 첫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인민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조직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 공동의 의사를 확인하며, 이를 함께 의논하여 그 결정사항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첫째, 전통사회의 인습·속박·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과 외부세력의 침략에 따른 위기의식에 자극 받아, 비판 및 대항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촉발되었다.


둘째,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가 그 기반이 되었다. 일례로 상민층의 성장은 전통적 상인의 근대적 상인으로의 개편과 조직화, 각종 상회 및 근대주식회사의 등장과도 관련되었다. 한편 농민계층은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전근대적 속박과 관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층도 광산채굴의 진행과 개항장의 무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천민층 또한 갑오경장이후 법적으로 신분해방을 이루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등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위기에 눈뜨고 있었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민회를 주도한 개화파 지도들 이외에 각 학교 학생, 선각적 여성, 시전 상인, 승도·백정·관료 및 신사 등 각계각층의 인민들이었다는 점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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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민중



만민공동회를 제안한 인물들은 개화파와 독립협회회원이었지만, 만민공동회를 이끈 사람들은 익명의 민중들이었다. 예를 들어 익명서 사건 이후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자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지새웠다.


장작불 시위는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확산뿐만 아니라, 의연금과 의연물 지원을 통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장국밥 3백 그릇을 보냈고 어떤 상인은 은화를 보내기도 했으며, 외국인들까지도 지지를 보냈다. 심지어 시장의 노파까지도 콩나물 판 대금 2원을 보냈고, 한 영남 유생은 의연금 4원을 먼 곳에서 송금하기도 했다. 익명의 민중들은 황국협회와 순검의 위협은 물론, 찬 겨울비 속의 고난을 무릅쓰고 6일 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지도자의 석방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외쳤다. 익명의 민중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싸우다 죽은 신기료 장수(구두수선공)인 김덕구 사건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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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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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24.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입력 : 2009.06.29 03:23 / 수정 : 2009.06.30 10:03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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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 ]


[ .... 미군은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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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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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익진영은 ... 통일만 주장했을 뿐 ....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 ]



1945.10.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




해방정국에서의 우익진영의 초기 열세는 45년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부터 다소 만회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무조건 단결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장기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알려진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천명한 2가지 사항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민당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이승만의 “먼저 단결하여 완전독립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친일파 문제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이 38선 철폐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줌으로써 소련의 행동은 무엇이나 옳다고 옹호하고 따라서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을 일방적으로 단절시킨 소련의 조치도 옹호해온 공산당의 입장을 수세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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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귀국 이후 우익진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38선의 철폐를 주장하고, 38선을 경계로 소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남북한 주민간 교통 통신 단절을 해제할 것을 반복하여 주장했다.


그에 반해 좌익진영은 48년 남북한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일만 주장했을 뿐 38선을 경계로 남북한간 교통 통신 단절의 해제를 주장해본 일이 단 한번도 없다.

좌익진영은 단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겨주고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서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처럼 되면 38선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만 주장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해방정국의 좌·우익 중 어느 쪽이 보다 자주적이며 통일지향적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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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14.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 기자의 수기 8


한재덕

고당의 명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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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대회에서도 '로마넹코' 소장이 '다와리시치'(동무) 김일성을 소개하고 그가 마치 일제와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최고의 애국자인 듯이 장황하게 늘어 놓고 "이러한 애국영웅을 지도자로 맞이하는 조선 민족을 축복한다"는 환영사인지 축사인지 모를 독단적 연설을 내리 읽었다. 후일 입증된 바와 같이 그실 이것은 이 김일성을 자기들의 공산위성국=북한의 영주로 임명하는 '사령장'의 낭독인 셈이었던 것이다.



이 날 조만식 선생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차피 연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생은 전날 밤과 같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마지 못해서 그를 환영한다고 간단히 언급한 다음 자기가 일상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기회에 한마디 하련다고 전제하고 일장의 연설을 베풀었다.사람들은 오래 간만에 대망의 조만식 선생의 열변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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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여간 지금도 기억나는 고당의 연설의 한 항목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보고 하도 못살게 굴다 못해 나중에는 정오 싸이렌이 나면 어디서든지 엄숙히 서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묵도를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정오 싸이렌 때마다 엄숙히 서서 하나님께 빈것은 일제의 무운장구가 아니라 일제가 하루 빨리 망하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무리한 일제의 뱃심 좋은 소원을 들어 주신것이 아니라 우리들 약소민족의 지당하고도 절실한 염원을 들어 주셨다. 그 어떤 자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당한 염원은 하나님의 은덕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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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5.10.목요일.






19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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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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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1. 평양



[ .....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 ]



[ .... 평양민보에는 ...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

.... 쏘모프가 ...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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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11월 23일" 신의주학생반공의거사건 당시 나는 아직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라고 하지만 그실은 소련사령부와 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평양민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평양에 하나밖에 없는 신문사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의주 사건을 어설프게나마 비로소 알게 된 것은 11월 25일경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철도도 소련사람들이 장악하고 제멋대로 운영하고 특히 약탈물자반출운전이 위주였기 때문에 각지간의 교통의 불편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 뉴스가 평양에 전해지는 것도 아주 느리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이 사건이 폭발하자 소련군정당국과 공산괴뢰들은 그것이 딴지방에 파급될까 당황하고 질겁을 하여 이 뉴스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백방으로 저지하기에 애를 썼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훨씬 늦었거나 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아니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연 모르고 지낸 사람도 허다 하였으며 모름지기 오늘도 북한동포 가운데는 아직도 이것을 일체 모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 통치자들의 뉴스 통제책이란 그렇게도 철저한 것이다. "철의 장막"이나 "참대의 장막"은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사이에만 쳐지는 것이 아니라 공산사회내부의 지방과 지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늘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일은 내가 이 사건을 비로소 주워 듣게 된 것은 이 뉴스를 막으려는 소련 사람들의 통제조치 때문에 도리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당시 평양민보에는 소련사령부로부터 우리신문의 검열과 지도를 위하여 쏘모프라는 젊은 군인 한사람이 배치되어 거의 신문사에 나와 살다시피 하였다. .... 이 쏘모프라는 소련군인은 아직 나이 젊고 계급도 높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말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서투른대로 신문검열의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사령부에는 그보다 군계급도 높고 아는 점도 그 보다는 많은 한국인2세 군인들과 통역관들도 많았지만 소련장군들은 새로 나오기 시작하는 이곳 신문검열과 지도를 위한 자리같은 중책에는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비록 젊고 낮고 서투른대로 쏘모프 같은 소련인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소련사람들이란 그렇듯 곰같이 끈끈하고 의심 많고 남의 나라 사람이란 비록 "공산주의 동무"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쏘모프가 하루는 내방에 들어와서 "신의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기도 자세히 모르겠는데(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신의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슨 기사이던 들어와도 취급하지 말라는 상부(사령부)의 지시라고 전하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일일인지 의아스럽게 여겨 사내 간부들에게도 이리저리알아 보았으나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몇시간 있다가 사령부에서 들어 오란다는 연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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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7.1.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한재덕







1945 신의주



[ ......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


......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 ....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 ]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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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 환영 모임을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아있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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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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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
2015-12-18 21:42:33
220.xxx.xxx.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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