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크리스토퍼 지음, 폴라북스 펴냄

현대문학-폴라북스의 과학소설 브랜드 ‘미래의 문학’은 문학사적인 의의뿐만 아니라 작품 본연의 재미에도 충실한 해외 걸작을 소개하고 있다.

미래의 문학 아홉 번째 도서는 존 윈덤의 『트리피드의 날』(미래의 문학07)과 함께 영국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존 크리스토퍼의 『풀의 죽음』(1956)이다.

 
볏과 식물(쌀, 밀, 호밀 등)을 공격하는 ‘충리 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난 세계적인 기근에 영국 사회가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작품이 발표된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유례없는 경제 성장기를 맞아 영국인들의 자긍심이 높던 시기였다.

가상의 사건이지만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는 대신 국민을 속이는 데 급급한 영국 정부, 생존을 위해 ‘영국인다운’ 고상함을 기꺼이 포기한 중산층, 무법지대로 변한 잉글랜드의 모습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풀의 죽음』은 영국인의 풍족한 삶이 자연과 세계 여러 국가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음을 꼬집고, 먹고사는 문제가 충족되지 않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야만 상태로 전락하는지 보여주었다.

작가 존 크리스토퍼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우리가 지금의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대재앙 이후에도 사회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지 묻는다.

『풀의 죽음』은 생존을 위해 문명의 겉치장을 쉽게 벗어던진 사회를 그린 섬뜩한 심리 스릴러이자, 환경 파괴로 인한 자연의 복수를 일찍이 경고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걸작이다. 1957년 존 크리스토퍼는 이 작품으로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함께 국제환상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풀의 죽음』은 ‘먹을 것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식량이 줄어들자 엄청난 수의 동물과 인간이 굶주림으로 죽어나간다.

치료법을 금방 찾을 거라던 과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해 세계를 초토화시킨다. 작가 존 크리스토퍼는 1950년대에 이미 자연을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과학 기술의 발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미래 문제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문제에 대한 영국인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이기주의를 건조하고 냉소적인 어조로 비판했다.

한편 저자 존 크리스토퍼는 본명이 샘 유드다. 1922년 4월 잉글랜드 랭커셔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평범한 성적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 록펠러 재단에서 애틀랜틱 문학 기금을 지원받아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본명으로 주류 소설을 쓰는 한편 윌리엄 고드프리, 윌리엄 바인, 힐러리 포드 등 장르에 따라 필명을 바꿔가며 50여 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했다.

존 크리스토퍼는 주로 SF 장르를 발표할 때 쓰던 필명으로, 『풀의 죽음』(1956)은 『혜성의 해』(1955)에 이어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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